영화 <1987> 후기

작품 개요
- 제목: 1987 (1987:When the Day Comes)
- 감독: 장준환
- 각본: 김경찬
-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설경구 외
- 개봉: 2017년
- 장르: 드라마, 정치, 시대극, 스릴러, 느와르, 군상극
- 러닝타임: 2시간 9분
나는 어어엄청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은 영화를 보지 않는다.
'택시운전사'도 엄태구 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봤고, 1987도 내가... 왜 봤겠니? 왜 봤겠어.
2017년 현재 내 마음의 대주주이신 그 아저씨가 특출이래서 또 이를 악물고 상영관으로 총총총....
이 일관성 있는 근현대사 영화 공포증의 시작은 '실미도'였다.
당시 급식이었던 나는 이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십 몇 년 인생에 가장 충격적인 감정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인생에 큰 슬픔과 고통이라고는 "기자놈들이 울오빠 신곡이 표절이라고 했어!! 주길꺼야!!!"와 "교복 줄였는데 학주가 칼로 박음질 뜯었어ㅠㅠㅠ" 정도였던 내게 실미도는 너무 큰 쇼크를 안겨준 영화였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각각의 일개 개인들이 얼마나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공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사화는 깡패끼리 치고받고 하는 장르와는 또 완전히 다른 충격이었다.
강제차출된 사람들이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면서부터 오열하기 시작해서 상영관 나올 때까지 나는 통곡을 했고... 그때 같이 봤던 내 동생은 "아이씨, 진짜 쪽팔려죽는 줄 알았네! 다시는 같이 영화 안 봐!" 라고 일갈하고는 그 후로 정말 두 번 다시 나랑 같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하하하.... 저게 2003년 영화니까 그 애가 나와 영화를 함께 안 본지 벌써 14년이 흘렀구만...세월 참...(먼산)
그리고 내게 근현대사 트라우마 비슷한 무엇을 안겨준 실미도 출연 아조씨들 중 한 명인 설경구를 14년이 지난 지금 덕질하고 있다니...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인생은 알 수 없지만, 설저씨가 나이 오십이 넘어서 리즈시절을 맞이한 건 잘 알고 있다. 잘생겼으면 다 오빠다. 설경구아저씨오빠.
설저씨는 영화 '1987'에서 이런 동네 등산아저씨 같은 룩으로 첫 등장을 하는데..

그래도 '불한당' 대관 인사 투어하던 시절에 촬영한 덕인지, 등산룩 쩌는 와중에도 아우라와 미모는 빛이 난다.
저 사진만 보고 '뭐가 빛이 나?' 하지 말고 극장 가서 봐라. 승복 입는 그 씬에서도 이목구비 자기 주장 쩔고 난리다.
살짝 허스키한 톤으로 말하는 대사 하나하나에 나는 "갸아아아아악!!!!!!!!!!!!♡♡♡♡" 내적 비명을 질렀고, 블루스크린 앞에서 찍었을 게 분명한 옥상 대롱대롱씬에서 또 "갸아아아아악!!!!!!!!ㅠㅠㅠㅠㅠㅠㅠㅠ" 내적 비명을 질렀다.
연희(김태리)가 신부님한테 톡 쏘듯이 자수하시라 하고 휑하니 가버리자 옆에서 너털웃음 터트리는 설저씨 목소리에 나는 '햐씨... 웃는 목소리 존좋...' 이라는 감동으로 정신이 혼미해져서, 전자렌지에 과하게 돌린 인절미처럼 녹아서 의자에 달라붙어버렸다.
사람들은 참치오빠 강동원이 마스크를 내릴 때 '우오오오오....!' 하며 점잖은 술렁임을 표했지만, 나는 김정남(설경구 배역)이 등장하는 모든 씬에서 내적 비명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움켜쥔 아메리카노 컵의 빨대를 잘근잘근 짓씹으며 조용히 앓았다. 심지어 사진으로 등장하는 씬에도 '나...나도 저 사진 한 장만 주세요...'라고 앓았다.
절에서 기왓장 옮기는 설저씨는 대체 또 왜 이렇게 청순한가..
이수진 감독님이 아저씨를 카레빵으로 구워내기 이전의 촬영이라 아주 그냥 막 그냥 하얗고 빛이 난다.

왜 카레빵인지에 대한 글
설저씨 미모 찬양을 한바탕했으니 이제 영화 얘기를 해보자.
'1987'은 잘 만든 영화다. 근현대사 영화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역시나 멘탈 데미지를 입었고, 실미도 트라우마가 잠시 되살아났으며, 아침부터 격한 감정소모에 기가 빨려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좋은 영화였다.
특이했던 점은, 딱 집어 누구 한 둘을 '주인공'이라고 꼽을 수 없을 만큼 모두의 출연 비중이 특별출연급이었다는 것이다.
한참 넋 놓고 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정우가 등장하지 않은지 꽤 오래 지났음을 깨달았다. 김윤석 아저씨 이외의 거의 모든 출연진이 '그러고 보니 어디 갔냐' 식으로 치고 빠지듯이 서사에 툭툭 등장하는 게 특이했다. 특정 인물이 아닌 '모두'가 이끌어 가는 이 영화는 바로 그 특이점 때문에, 실제 그 당시를 살았던 '모두'의 아픔과 피눈물을 2017년 현재에 더욱 생생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근현대사의 아픔을 다룬 영화에서 일반 시민들, 어린 학생들이 맨주먹으로 달려나가 시위를 하다가 총과 군화 앞에서 처참하게 마치 고깃덩이 발로 차는 듯한 무자비한 폭력에 스러지는 영화의 장면들을 볼 때면, 과연 내가 저 시대의 청년이었다면 저렇게 민주화를 위해 학교로 광장으로 달려나갈 수 있었을까 자문하게 된다. 처음에는 데모대 탄압을 위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니까 객기 좋게 달려나간다 해도 멀찍이서라도 저런 상황을 보고 나면 아마 두 번 다시 시위의 ㅅ자에도 끼려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스스로의 그런 비겁함과 무력함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를 보는 것이 더 괴롭게 다가와서 피하고 싶은 게 아닐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감독님이 자기 영화 본 직후에 계속 훌쩍거리면서 언론시사회에 임할만한 영화였다. 꼭 손수건 쥐고 가세요..
아, 글구 악역 맡은 김윤석 아저씨 진심 무서웠다... '사람'이기보다는 무슨 '맹수'가 사람 껍데기 쓰고 안기부에 앉아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존재 자체에서 뿜어내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무서웡.....ㅠㅠㅠㅠ 꾸엥ㅠㅠㅠㅠ
글구 조선족 사투리랑 이북 사투리랑 구분 못하는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웃기지만, 진짜 북한에서 5개월 전에 내려오신 분이라고 해도 그런가 보다 싶을 정도였다. 역시 킹 오브 사투리 마스터답다.
아, 그리고 영화의 배경과 소품들 다 정말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영화 보는 동안 '와... 저거 다 올해 찍은 건데 대체 우리나라에 저런 80년대스러운 장소가 다 어디서 났어....?'라는 생각으로 몇 번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연희(김태리)네 구멍가게의 물건들 하나하나에도, 연희 방에 있던 물건들, 연희네 학교 내부 외부, 최검사(하정우) 사무실과 안기부 실내, 그곳에 있는 모든 집기들에도.
집에 와서 제작기 영상을 찾아보니 당연히 모든 건물이 다 있는 야외처럼 보였던 곳들이 블루스크린으로 뒤덮인 세트였더라고. 나중에 더 자세한 제작기 영상 넣어서 DVD 만들어주면 꼭 사서 보고 싶다.
진짜 너무 신기해... 막 불쏘고 용 날아다니는 판타지 영화보다, 천만대군 이끌고 장수가 전쟁 나가는 고려, 조선시대 영화보다 이런 '현실에서는 이제 볼 수 없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영상으로 구현해내는 것이 더 신기하다. 응답 시리즈도 고증 쩔어서 다들 너무 놀라워했듯이.
'영화 미술'은 어디까지가 영화 미술이야? 블루 스크린으로 배경 CG 만들어내는 것도, 과거 제품 재현해서 소품 만드는 것도 다 영화 미술에 들어가는 건가? 뭐든 간에 항상 신기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