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후기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화다. 예술에 대한 욕망과 운명이 교차하면서 인물들의 결이 점점 선명해진다.
작품 개요
- 제목: 국보 (Kokuho)
- 감독: 이상일
- 각본: 오쿠데라 사토코
- 원작: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국보》
- 출연: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와타나베 켄 외
- 개봉: 2025년
- 장르: 드라마, 역사
- 러닝타임: 2시간 55분
※볼 거면 아무 스포도 밟지 말고 보세요. 이 글에는 스포가 있습니다.
줄거리
야쿠자 집안의 외아들로 자란 키쿠오는 가부키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반대 세력의 습격으로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가족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고, 과거에 키쿠오가 가부키 연기하는 모습을 본 적 있던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가 소년을 거둬 제자로 삼는다.
한지로에게는 가부키 명가의 핏줄을 잇는 아들 슌스케가 있었고, 키쿠오와 슌스케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무대에서 성장하며 서로에게 경쟁자이자 떼어낼 수 없는 동반자가 되어간다.
쇼츠와 1.5배속 재생에 절여져서 집중력이 발끝에 떨어진 상태라 3시간짜리 영화를 볼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궁금은 해.
그래서 친구랑 같이 가지도 않았고 혼자서 출입구 가까운 통로석을 예매했다.
여차해서 지루하면 바로 뛰쳐나오려고.
그런데 3시간 동안 시계 한번 안 꺼내보고 정말 몰입해서 봤다. 체감 시간은 1시간40분 정도였으려나. 정말 순식간에 모든 장면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흘러갔다.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당뇨 조심하세요"다.
아니, 농담이고...
영화 후기에 앞서 가부키 얘기를 해보자면 내가 일본에서 살고 있던 2008년 당시에 사오토메 타이치(早乙女太一)라는 17세 정도의 미소년이 현지에서 인기였다.
가부키 집안의 아들로, <국보>에서 3대째 가부키 집안을 이어가는 슌스케가 '산다이메(3대)'이듯이 사오토메 타이치는 2대라서 '니다이메'였다.
천년에 한번 나올 천재 온나가타(가부키에서 여자 역할을 하는 배우)라고 난리였고 워낙 이쁘장하게 생겨서 나도 그때 공연을 보러 갔었다. 나는 얼빠니까.
<千年の祈り(천년의 기도)>라는 작품이었다.
세상에 그게 유튜브에 다 있네ㄷㄷㄷ
업로드 연도를 보면 2008년 공연은 아니고 재공연인가 싶은데 어쨌든 저거였다.





그때 구입했던 프로그램북의 사진들이다.
2008년에 찍어서 블로그 포스팅 했던 사진들이라 화질이 고대유물 수준이다..
그리고 2009년에도 공연을 보러갔었다. <わらべうた(와라베우타)>

그렇게 나름의 라이트한 덕질을 했지만, 두 번의 가부키 공연을 보는 동안 '타이치가 예쁘네' 이외의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가부키가 본업인 앤데 내가 그 장르에 흥미를 못 가지니 당연히 덕심은 굉장히 빨리 식었고 금세 관심을 거두는 결말이 나고 말았다.
(지금 유튜브 찾다 보니까 심지어 다 성장하고 나서는 어릴 때처럼 예쁘지도 않구나...)
국보 감상
하여튼 그런 내 짧은 덕질의 경험 때문에 가부키라 하면 젊고 예쁘장한 남자가 기모노 입고 여자 역할을 하는 전통 공연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국보>를 보면서 새삼 새로이 깨달았다.
아... 온나가타가 늙어서도 계속 온나가타를 할테니 중년 아저씨도, 할아버지도 여장 연기를 영원히 하는 게 가부키구나ㅎㄷㄷ
참으로 1차원적이고 예술로서의 가부키를 하나도 이해 못하는 무식한 감상이겠지만, 정말 그랬다. 대체 할아버지가 여장하고 젊은 아가씨 연기를 하는 것에서 무슨 예술과 감동을 느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단순히 '여장하고 연기하는 남자들 얘기' 같은 무식한 요약으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무대를 표현하는 모든 장면은 아름다웠고, 3시간에 걸쳐 그려낸 긴 세월 속에는 핏줄과 재능, 질투와 절망 그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가부키 공연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누구는 그것들이 너무 길다는 평을 쓰기도 했지만, 나는 적당한 분량이라고 생각했다.
의상과 무대, 대체 얼마나 시간을 들여 고생하며 배웠을지 상상도 안 가는 주연 배우들의 가부키 연기,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연출.
감탄하면서 봤고 너무나 훌륭했지만, 그래도 계속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남자가 여장하고 높은 목소리로 희한한 소리를 뽑아내듯이 말하는 저게 대체 왜 어쩌다가 전통 예술이 된겨..
다카라즈카(여자가 남자 연기까지 다 하는 일본 대중 공연 장르)는 왜 사랑 받는지 알 것 같긴 하거든?
여성 국극을 다룬 드라마 <정년이>에서의 정은채를 떠올려보면 그 옛날 국극 왕자님의 인기도 충분히 이해가 가거든?
근데 가부키는 배우 인기는 차치하고, 일단 '핏줄' '집안'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틀이 잡혀 있다고 해야 하나.
다카라즈카도, 국극도 배우가 대를 이어서 하면서 그걸 핏줄로 이어가는 명문가라고 인식하지 않잖아? 가부키는 왜 저렇게(?) 된 걸까.
남장 연기하는 여배우들은 그냥 자기 발로 다카라즈카 학교나 극단에 가서 배우고 데뷔하고 연기하는 루트를 밟고 살았는데 여장 연기하는 가부키 남배우들은 어쩌다가 각자 집안의 카르텔(?)을 만들어서 저런 문화를 갖게 된 걸까.
키쿠오가 그랬듯이 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부키 집안의 후계자라는 것이 외부인은 영원히 닿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고귀한 피겠지만 진짜 가부키와 1도 상관없는 타국의 이방인이 볼 때는 '저게 뭐하는거여' 라는 감상이 들게 하는 업계이기도 하다.
가부키 집안으로 시집 간 일본 여자 연예인들의 말로를 생각하면 더 더욱...

어쨌든 <국보>의 주인공 둘 중 한 명은 집안의 후계자, 한 명은 후계자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애제자.
두 소년이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부침과 절망이 둘 사이를 오간다.
누가 더 잘 됐다고도 말할 수 없고, 누가 누굴 이겼다고도 할 수 없이 운명은 둘을 번갈아 정상에 올리고 바닥으로 끌어내리기를 반복한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관계는 일본의 영원히 완결나지 않는 만화 <유리가면>을 떠올리게도 한다.<유리가면>이 궁극의 목적지로 그리는 '홍천녀'도 좀 저런 전통의 느낌이잖아.
결국 장수하는 놈이 이긴 건가...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섰다.

12억엔(112억원 정도) 들여서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해외에서 1,398억원(25년9월21일 기준)을 벌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1,616억원(25년11월16일 기준)을 벌었다.
대박났네ㄷㄷ
결국 끝까지 가부키 자체의 예술적 가치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간 삶의 유한함과 허망함, 그 속에서 자신이 좇는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해 영혼까지 불사르는 두 사람의 간절함과 열망은 아주 깊은 여운으로 남았다.
난 이제 이 영상들 보러 갈 거다. 올라오자마자 보고 싶었는데 영화 보고 나서 보려고 참았다.
+
이 인터뷰 영상도 너무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