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기를 쓰다 1 (흠영 선집)
저자 소개
저자 유만주(兪晩柱)는 1755년 2월 4일, 유한준(兪漢雋, 1732∼1811)과 순흥 안씨(順興安氏, 1734~182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친가는 서울 옥류동(종로구 옥인동)에, 외가는 경기 과천에 있었으므로 서울의 권역 안에서 나고 자랐다고 판단된다.
서울내기인 그의 생애는 한 양반 가정의 외아들로 자라 두 여성에게 남편이 되고 다섯 아이에게 아버지가 되어 살았다는 것, 그리고 삶의 대부분을 혼자서 읽고 쓰는 데 할애했으며, 그 결과 스물네 권의 방대하고 치밀한 일기 『흠영』(欽英)을 남겼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서른네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1788년 1월 29일, 부모와 아내와 어린 1남 2녀를 뒤로한 채 서울 창동(중구 남창동)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일기를 태워 달라는 유언을 아버지께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상 깊었던 부분 발췌
'책머리에' 중에서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므로, 당연히 그걸 늘이거나 줄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겪는 일들은 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므로, 그 경험을 상세히 기억하거나 간략히 덜어내는 것은 오직 내가 할 노릇일 따름이다. (중략)
이렇게 일기를 씀으로써 저 하늘이 나에게 정해 준 목숨을 끝까지 남김없이 살며 하나도 폐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p94
1783년 3월 23일
아침에 옷을 갈아입었다.
마음이 담박한 사람을 나는 아직 못 봤다. 나부터도 담박하지 못한데, 세상에 다시 담박한 자가 누가 있겠는가?
p286
1780년 6월 22일 크게 더웠다.
아침에 첫아이가 『몽훈』을 떼었다. 우리나라 풍속 중에, 어린이가 읽기로 한 책을 다 읽은 날이면 칭찬을 해주며 떡이며 약밥, 과일 등속을 주어 격려하는 것이 있다. 우리 집은 가난하고 검소한지라 그런 풍속을 따를 수 없기에 황명정옥 한 개, <삼국지독법수상> 한 권, 관동 지방에서 만든 종이 한 장, 큰 비단 종이 한 폭, 남경(南京)에서 만든 다고(차의 일종) 세 알, 그림을 새긴 데다 붉은 안료를 채워 넣어 무늬를 만든 조그만 상자 하나, 황양목을 깎아 만든 문진(文鎭) 하나를 주었다.
감상
18세기 조선 시대에 청운의 꿈을 품었으나 그리 좋은 벼슬 자리 한번 앉아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삶을 마친 유만주가, 스물한 살이 되던 1775년의 첫날에 쓰기 시작하여 서른네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죽기 한 달 전까지 13년간 쓰고 스스로 책으로 엮어 '흠영'이라 이름 붙인 일기글을 엮은 책이다.
"밤에, 사관(史官)이 되는 꿈을 꾸었다." 고 일기에 적곤 했던 그는 요즘 말로 책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서를 좋아했고, 역사서를 편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번번히 과거에 낙방하며 번듯한 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이름 한번 크게 빛내지 못한 채 아픈 아들을 돌보며 매일의 일상과 속내를 상세하게 기록하다가 본인마저도 젊어서 요절했다.
홍역을 앓던 세 살배기 아들이 고비를 넘기기까지 매일 증상과 어떤 약을 먹였는지 기록하는 그 손길에서는 젊은 아버지의 부성애가 묻어났다. 아이가 겨우 고비를 넘기고 난 후, 먼저 간 아이 엄마를 꿈에 봤다고 적은 1775년 어느 밤의 일기는 마치 어제 오늘 쓰인 누군가의 일기처럼 생생한 아련함을 담고 있었다.
14살부터 크게 아프기 시작한 큰 아들은 다음 해 봄 무렵에는 가망이 없는 상태에 접어든다. 아버지 유만주의 일기는 아들의 병 기록으로 가득 차게 된다.
병실에 들어가지 않고 밤새도록 소식만 들으면서 밖에서 배회했다.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병록을 적는 일밖에 없는가?라고 미어지는 마음을 일기에 한탄한 그 다음 날, 그는 이렇게 적었다.
1787년 5월 12일 가랑비가 뿌린 끝에 흐려졌다. 교환(큰 아이의 이름)의 병 때문에 새벽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정말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다. 아침에는 윗사랑채에 가 있었다. 들어 아는 데서 멀리 벗어나 있고 싶다.
정말로 이단(異端·여기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생의 원한을 이번 생에 갚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 따져 보면 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이치에 달관한 자임에도 자식을 잃고 나서 눈이 멀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중략)
초저녁에 머리 풀고 곡을 하여 초상이 난 것을 알렸다.
차마 자식의 죽음을 지켜볼 수 없어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사랑채를 서성이던 그는, 공자의 제일 잘난 제자였던 자하가 자식을 잃고 눈이 멀었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의 괴로움을 그에 비유한다.
1787년 7월 22일바깥채로 거처를 옮기고 책상과 문방구를 대략 정리하다가 우연히 세 권의 책력을 하나로 묶어 둔 것을 들춰 봤더니 모두 교환이 쓰던 것이다. (중략)
교환이 기뻐하며 그 글씨를 쓰는 모습을 떠올려 봤다. 죽기 엿새 전에도 정신이 이처럼 또렷했는데, 그 애가 금년에 죽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도 모르게 아픈 눈물이 오래도록 흘렀다.
1787년 8월 14일
네가 죽은 후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었는데 너의 혼령을 내 꿈에서 만나 볼 수 없으니 아마도 사람이 한번 죽고 나면 아득히 텅 비워져 다시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혼령이 서로 이어지고 이끌어 주는 일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것이기 때문일까? (중략)
아니면 살아 있는 동안 엄마 얼굴을 알지 못했던 네가 죽고 나서 엄마를 보아 즐겁고 기쁜 나머지, 죽지 않은 나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게 된 걸까?
1787년 9월 29일
아아! 밤에 나는 꿈을 꾸었다. 마루 끝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네가 보였다. 내 앞에 와 앉은 그 모습에는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평상복을 입고 꿇어앉아 있는데 손이 몹시 앙상하여, 나는 나도 모르게 네 손을 잡았다. 너는 문득 잠은 잘 주무시는지 여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다가가 너를 안고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막 울면서도, 비록 꿈속이긴 하나 네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시 너를 보게 되어 놀랍고 기뻤다. 그렇지만 또 네가 살아 있을 때처럼 너를 오래 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탓에 정말 나도 모르게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밭은 소리로 울다가 깨어났다. 깨어나니 이미 눈자위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놀랍고도 뼈에 사무친 나머지, 일어나 앉아 흐느끼는데 파루 소리가 막 끝나고 이제 날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역사책의 저자가 되고 싶어했던 젊은이는 열 다섯의 큰 아들을 잃은 아픔을 마치 피를 토하듯 자신의 일기에 적어내려갔다. 또 다시 꿈에서 아이를 보았다는 1787년 11월의 글로 이 책의 일기는 끝나고, 유만주는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한 채 다음 해 1월29일로 숨을 거두었다.
'일기'라는 것에 늘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흥미의 일환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아이를 잃은 후 기록된 일기들을 읽으면서 그 어떤 슬픈 영화를 보았을 때보다도 많이 울었다.
비록 그는 푸르던 시절 꿈꿨던 역사학자도 집필자도 되지 못하고, 먼저 보낸 아이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그가 13년 간 24권에 걸쳐 상세히 기록해왔던 매일의 일기는 개인의 일상 뿐 아니라 그 당시의 풍속과 사회를 담아낸 사료(史料)가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단독 전시회도 있었던데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미 전시가 한참 전에 끝난 시기였던 것이 안타깝다.

자신의 일기가 후대에 이렇게 책이 되고, 역사 박물관의 전시회에 역사 사료로 다루어 질 것이라는 걸 그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지금의 무엇이 미래의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정말 아무도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