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리뷰(12/29-1/18): 아.. 잘못 들어왔어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아주 파란만장한 첫 달을 보내고 있다.
대표님도 괜찮은 분이고, 장기 근속자들도 꽤 있고, 사무실도 쾌적하고 다 좋은데 문제는 우리 사업부(팀과 팀을 묶어서 사업부로 칭한다)가 이 회사 최강의 헬부라는 거다.
이 많은 사업부 중에 hell로 들어와부렀어. 심지어 그 무덤을 내가 팠다는 게...
입사는 A사업부로 했다. 근데 B사업부의 부장이 찾아와서 자기네 마케팅팀의 관리자로 오라고 몇 시간을 붙들고 설득을 하는겨. 처음엔 시큰둥 했다. A사업부는 대표님 직속이기도 하고, 그 일도 잘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근데 내가 전 직장들에서 원래 하던 게 마케팅이었는데 A사업부는 마케팅 하는 곳은 아니어서 B부장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마케팅 계속 하고 싶어서 B사업부로 가고 싶다고 했고 대표님은 "B부장이 마이크로 매니징을 한다..."라고 하면서 나를 재배치 해주셨다. 그리고 이틀 만에 그 말 뜻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하루종일 각 팀 리더부터 인턴까지 수십 명을 돌아가면서 카톡 혹은 말로 조지는데, 처음엔 놀랍고 경탄스러웠다.
"와, 나르시시스트다!"
정말 정신과 교과서에서 꺼내왔나 싶은 나르시시스트여서 하루종일 그렇게 지적하고 달달 볶는 거에서 도파민을 얻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달달볶음밥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거다. 워드샐러드 그 자체에다가 판교 사투리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수십 명 중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워드샐러드가 뭐냐면, 이 기사를 보면 안다.
광고주에게 보낼 제안서나 리포트 하나를 써가면 장문의 피드백이 날아오는데 대부분이 무가치한 소리다. 하지만 "와 개소리! 반영 안 할 거지롱!" 이럴 수는 없으니 묵묵히 모든 팀원이 야근하며 매달려서 무가치한 피드백을 반영해서 수정하고, 수정하고, 수정하고, 1p짜리 제안서는 점점 대학원 논문이 되어간다.
내가 광고주면 "이게 뭥미? 이거 논문 쓰느라고 제안서 하나 가져오는데 백 년 걸렸어요?" 싶을 듯. 이미 광고주들은 우리가 느려터졌다고 인식하고 있다.
선생님, 저희 팀은 빨라요. 심지어 애들이 다 성실하고 책임감 쩔어서 MZ들인데 매일 야근에 철야를 해요. 근데 무가치 피드백 만 개 반영해서 이상한 논문 만드느라고 오래 걸리는 거랍니다! 모르셨죠? 짜잔!
이렇게 우리는 마케팅팀이 아니라 논문팀이 되어서 광고주에게 세상 가장 느린 마케팅 대행의 쓴맛을 보여주고 있다. 근데 그들이 왜 아직 안 떠났느냐?
싸니까. 어떤 시책은 거의 원가에 가깝게 제공하는 무료 봉사를 하니까.
왜 무료 봉사를 하느냐? 부장 탓이냐? 나도 첫 주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근데 가만 보니까 부장 위에 거래처 대표님이 있어. 우리 댚이 아니라 거래처 댚이...
거래처 댚이 우리 사업부에 아주 큰 광고주를 물어다줬고, 그래서 우리 사업부의 생존이 중간 브로커 같은 그 분의 인맥과 의지에 달린 이상한 구조더라. 그러다 보니 그 분이 자기와 친한 회사들한테 ㄸ값으로... 아니, 언어를 순화하자. 소기업/신생기업의 마케팅 대행을 우리 팀에게 저렴하게 맡기시는데 큰 광고주(王고주라고 부르자)를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그걸 거절할 수 없는 상황.
근데 새로 온 마케팅팀 리더로서 기가 막히는 것은, 그 왕고주를 물고 있으면서 버는 큰 돈은 마케팅 팀의 수익이 아니고 우리 사업부 ㅇㅇ팀의 수익이라는 거다. 같은 사업부라고는 해도 큰 수익은 ㅇㅇ팀의 매출인데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마케팅팀이 신생기업의 저렴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철야 논문을 쓴다. B부장은 그 ㅇㅇ팀 출신이기 때문에 ㅇㅇ팀의 수익이 곧 본인의 능력 입증이고 가치다.
어떤 마케팅 시책은 애들 리소스를 그렇게나 들이고도 한 달에 순수익이 5만원 남고, 10만원 남고 그런다. 그 말도 안 되는 가격은 우리 팀의 의지로 광고주에게 제안했던 것이 아니다. 원가에 적정 가격을 얹어서 제안서를 쓰면 부장이 보고, 거래처 댚이 보고는 '이만큼 얹는 게 말이 되냐'고 값을 낮추게 해서 짱저렴 운영을 제공하게 되는 거다.
업체를 소개 시켜주고 마케팅 기획을 잡아준다는 이유로 우리가 쓴 예산안 제안을 검수하고, 지적해서 수익률을 바닥급으로 낮추게 하면서 광고주가 우리에게 주는 그 쥐똥만한 매출의 n%도 거래처 댚이 가져가신다.
이게 대체 무슨 구조지... 부장은 왜 나한테 여기가 마케팅 팀이라고 했지? 여긴 왕고주 붙들기 위해 거래처댚 원하는 대로 무료 서비스 제공하는 논문팀인데?
근데 심지어 우리 팀의 목표 매출치도 있다. 무료 서비스팀이 돈을 어떻게 버는데 목표 매출값이 있을 수가 있나요? 우리는 마케팅팀이 아니고 B사업부 ㅇㅇ팀의 운영지원팀(이자 거래처댚의 친구들 좋으라고 존재하는 팀) 같은데?
돈 없는 신생 기업에게 헐값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면서 그 회사가 매출이 안 나오면 우리가 마케팅을 잘 못해줘서 그런 거라는 탓이 돌아오고, 다음 분기 마케팅 대행비는 더 후려치는 근거가 된다. 매출 나오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마케팅비를 많이 받으려 하냐고. 신제품도 안 내놓고, 임팩트 낼 정도의 마케팅 할 돈도 없는 회사들인데 안 팔리면 마케팅 대행사 탓이여? 이게 대체 무슨 아전인수인지?
지난 주에는 거래처 댚이 신생 기업의 SNS 운영 대행을 우리 보고 하라길래 일단 운영대행비로 얼마를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처음부터 '운영 대행은 n백만원입니다'라고 하면 또 잡도리 파티가 시작될테니까.
우리는 이미 다른 광고주들의 SNS운영대행도 하고는 있다. 거긴 거래처 댚과 상관없이 하는 곳이라 한 달에 n백만원씩 제값을 받고 열심히 해주고 있다. 거래처댚의 똥값시전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업체라서 제값을 받을 수 있는 거고, 제값을 받으니 우리한테 계속 대행을 맡기시길 바라며 열심히 한다.
하여튼, 얼마를 생각하시냐고 했더니 '크몽에서는 보통 1~2백만원 한다'라고 답장이 왔더라고? 크몽에 들어가봤다.
한 달에 인스타 10개 올려주고 50만원. 한 달에 12개 올려주고 120만원. 대략 이런 느낌? 근데 크몽보다 우리한테 맡기는 게 더 퀄이 좋다고 생각하니까 크몽으로 안 가고 우리한테 문의하시는 거잖여? 당연한 거 아냐?
그래서 한 달 6개 업로드 기준으로 n백만원이다. 업로드 외에도 뭐뭐뭐가 포함되는 금액이다. 라면서 크몽보다 높게 불렀더니 '인스타 운영 대행은 최소 월 10회 이상 업로드가 기본이다.' 이렇게 답이 왔더라고? 그 n백만원에 매달 10개 이상씩 올리라는 말이구나 싶더라.
10회 이상? 아따 가능하쥬! 돈만 주시면 가능하쥬!
그래서 '10회 기준이면 n백만원+n십만원입니다. 뭐뭐뭐가 포함됩니다. 몇 개 업로드를 기준으로 하실지 검토 부탁드린다'라고 했더니 답장 안 옴.
내 부하직원이 '그 대표님 빡치셨을 거예요....'라더라. 어떤 식으로 일해왔는지 너무 느껴지는 말이었다. 어, 빡치셨을 거 같아요. 이 퀄도 안 되는 싸구려들이 감히 6개에 n백만원을 불러? 새로 온 걔는 내가 왕고주랑 친한 거 몰라?
알아유, 압니다. 왕고주랑 결혼을 하신 사이인지 매일 밥을 먹는 사이인지까지는 모르지만 그 매출 덕분에 저희가 찍찍 소리도 못하는 거 같긴 하더라고요?
근데 회사의 대표 사업부의 매출 거의 대부분이 한 거래처 대표의 인맥에 의지하고 있는 거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슴메? 그래서 거래처에게 휘둘리고 있으면 그건 우리 대표님의 회사임? 아니면 거래처 대표의 회사임?
인스타 운영 대행은 최소 월 10회 이상 업로드가 기본이다?
누가 정한 기본이여? 교과서에 있어? 아니면 나랏법이여? 물건이든 서비스든 파는 사람 맘 아녀?
창식이네 국밥집 가서 “야이 느자구 없는 자식들아, 니들은 왜 국밥을 만3천원에 파냐, 크몽이네 국밥집은 5천원에 판다. 그게 기본이다. 그러니 지금 니들 국밥을 5천원에 내와라.” 하면 “예, 손님. 그게 기본이군요. 5천원에 드시죠.” 이러고 내오겠냐? 크몽이네 가서 잡수세요! 하겠지.
난 이 회사 이 사업부의 이상한 수익 구조에 큰 의문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일원으로 합류했으니 팀 애들과 매일(비유가 아니고 진짜로 매일) 야근하면서 부장과 거래처 댚의 만 가지 수정 지시에 최대한 맞추고 있다. 하지만 나도 성격이 개같아서 틀린 건 틀린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라서 '이 나라 국밥 기준 5천원 오게이! 고기에 국물에 원가는 만원이지만 5천원에 드릴게! 그게 기본이라며!' 는 못하겠고 정중하게 개겨보는 중이다.
이래놓고 결국 내 국밥을 5천원에 갖다 바치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우리 팀 매출도 아닌 ㅇㅇ팀 매출(=부장의 존재 가치 입증)을 위해 왕고주를 붙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대표 사업부가 휘둘리고 있다면 차라리 왕고주를 끊어내고, 클린하게 제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거래처가 끼지 않은 광고주 개척을 해서 쌓아 올리는 게 장기적 관점에서는 안정적인 회사 운영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장 매분기 마다 왕고주가 주시는 그 큰 돈이 얼마나 달콤해. 그리고 거래처 댚이 발도 넓어서 이 바닥에 상당히 많은 광고주들이 지인이고 친하고 그렇다던데 그래서 부장도 우리 댚이 아니라 거래처 댚의 직원처럼 움직이는 건가 싶기도 하다.
부장은 그러던데 뭐. 자기는 이 회사 나가도 거래처 댚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그런거면 제발 그냥 지금 좀 데려가서 어떻게 좀 해봐요, 크몽 아저씨)부장은 거래처 댚이 우리 회사 내부에 심어놓은 인간 CCTV이기도 하다. 대표님도 모르지 않으실텐데 왕고주 매출이 아따 달달혀... 그래, 그런 거지.
몇 달 후에 왕고주가 우리랑 재계약 하실지를 결정한다는데, 제발 우리를 팽 했으면 좋겠다.
선생님, 저희랑 하면서 맘에 안 드는 부분 많으셨죠? 그렇죠? 제발 그렇다고 말해요. 우리에게 사요나라를 고해줘요, 그대여. 세상에 우리랑 똑같은 업무를 하는 회사가 얼마나 많아요. 이제 제발 다른 회사와 해보시는 게 어때요? 거래처 댚이 아는 대행 회사가 우리 밖에 없는 건 아니길 바래요.
이건 항암치료 같은 거다. 왕고주가 떠나면 달달 매출이 사라지니까 당장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겠지만 항암 치료라고 생각하고 아프고 독한 약을 맞듯이 제로부터 개척하고 쌓으면 암 걸린 100kg였던 몸이 암 없는 건강한 6-70kg가 될 거다.
아니, 백키로 회복 못 해? 회사와 남자는 규모와 풍채 아녀?! 싶을 수도 있지만 개기름 끼고 암 걸린 과체중 100kg보다 채식하고 건강한 미달 체중 60kg가 낫지 않습니까.
하여튼 이상한 나라를 경험 중이다. 야근하느라 힘들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 모든 상황이 웃겨서 중국산 게임을 몸으로 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뭘 선택해도 계화탕 쳐먹.

거래처 댚이 계화탕을 하사해서 회사에서 짤리면 실업급여가 달달하것지. 왕고주가 수십 억을 벌게 해준다고 해도 내 팀 매출도 아니고, 내 인센티브가 되어서 내 지갑에 단돈 10원도 더 꽂히는 게 아니지만 아따 실업급여는 내 지갑에 꽂혀부러!
계화탕 같이 드실? 크몽 기본 10그릇부터란다.